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도 제국 (문단 편집) == 평가 == '''전반적으로 좋게 보지 않는다.''' 인도 제국은 근본적으로 피정복민들을 착취해서 본국을 살찌우는 식민제국으로서의 한계가 명확했고, 실제로도 존속 기간 내내 인도의 막대한 부를 침탈하여 [[영국]]으로 실어나르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했다. 게다가 9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끊임없이 인도인들을 하인으로 부리면서 영국인들의 탐욕을 채웠으며, 인도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계대전]]에 2번이나 참전시키는 등, 인도인들의 뜻은 정책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평상적으로, 심지어 인도에서 기근이 들어 몇 백만 명에 달하는 아사자들이 발생했을 때에도 [[산미증식계획|영국의 식량 값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엄청난 양의 쌀과 밀들을 영국으로 강제로 수출하도록 했으며]], 한때 전세계 GDP의 25%를 차지하던 경제대국을 전세계 GDP의 5% 밖에 되지 않는 빈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당시 인도의 인구가 5억 5천만 명에 달해서 세계 인구의 24% 가량을 차지하던 것을 생각하면 세계 GDP 기여분이 5%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당시 영국이 인도에서 200여 년동안 강제적으로 수탈했던 인적, 물적 자원들을 모두 환산하면 44조 6천억 달러, 물가 상승을 감안하면 현재 가치로 대략 '''5경 원'''에 달한다는 연구 조사가 있을 정도다.[* [[조(수)|조]] 다음의 그 [[경(수)|경]]이 맞다. 인도의 경제학자 우트사 파트나이크가 추정한 수치다. ] 혹자는 영국의 식민지배가 인도에 [[민주주의]]와 의회제도를 정착시키는 데에 공헌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론 영국이 인도에 선거를 실시하고 의회를 구성한 것은 맞다. 하지만 분리선거구제를 실시하여 극소수의 친영 인도인들에게 제한적인 선거권만을 부여하였고, 종교와 계급, 보유 자산, 영국에 대한 충성도 등에 따라서도 선거권에 차별을 두었다. 영국의 식민통치기 때에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인도의 민주주의 제도 때문에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은 독립 이후에도 정치적 부침이 끊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영국은 인도인들에게 독자적이고 자발적인 민주주의를 형성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버렸으며, '영국이 아니었다면 인도는 스스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선민의식]]과 [[백인우월주의]]에 가득찬 식민지주의자들의 주장일 뿐이다. 영국이 인도에 남긴 폐해는 정치적인 것에만 미치지 않는다. 영국 당국은 섬유, 해운, 철강, 조선 등 한때 인도가 영국보다도 앞섰던 산업 분야에 대한 철저한 탄압을 지시했다. 영국 정부는 인도의 제조업 성장을 방해했고 빼돌린 원자재로 자국의 산업만을 육성했다. 인도의 세계 제조업 수출 비중이 18세기 초에 27%였던 것이 독립할 무렵에는 2% 수준으로 추락했고, 인도는 모든 분야에서 타 서구 열강들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열세에 놓여있었다. 인도는 근대식 경제체제를 독자적으로 발전시킬 기회를 빼앗겼다. 그 결과 인도는 그 막대한 잠재력을 제대로 쓰지도 못한 채 강제적으로 서구 자본주의의 하부 구조물 수준으로 가치가 절하되었다. 또한 인도에서 자생중이던 수공예 산업, 가구 산업 등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값싼 영국산 상품들을 판매함으로써 인도를 자국의 독점 시장 그이상 그이하로도 여기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대규모 자본을 손에 쥐고 절대로 인도인들 사이에서 자신들과 비벼볼만한 혁신가들이 탄생하지 못하도록 정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탄압했다. 이같은 짓거리를 영국은 인도에게 거의 몇 백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해왔고, 초대 [[인도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는 대놓고 '우리 인도는 소위 선진적이라는 영국이 개입하기 전보다도 훨씬 가난해졌다'라고 비꼴 정도였다. 영국이 현대 인도에 남긴 그나마 긍정적인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인도 아대륙]]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대륙에 하나의 [[인도 공화국|통일국가]]를 수립하는 것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영국이 들어오기 전 인도는 [[마우리아 제국]]과 [[무굴 제국]] 시기 최남단 일부를 제외한 인도 대부분을 정복한 사례가 있었지만 전 인도 아대륙이 하나의 정치권력의 지배받았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심지어 독립 이후에도 일부 국가가 종교 문제로 떨어져 나간 게 현재 상황이다. 인도와 같은 거대 국가인 [[중국]]이 [[한족]]이라는 압도적 다수의 민족이 존재하여 수천년간 통일정권을 유지해온 것과 달리 인도는 인도 아대륙에 다수를 차지하는 인도민족이라 할 만한 주류민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마다 스스로를 같은 민족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종교도 달랐다. 그러니 인도 아대륙 내에 여러 국가들이 공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이 인도 전체를 정복하고 단일정권 하에 지배하였고, 의도치 않았겠지만 피지배민들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인도인들의 마음 속에 '[[인도]]'라는 국가적 개념과 '[[인도인]]'이라는 민족적 개념을 심어주었다. 이렇게 영국에 의해 하나의 인도라는 행정적인 체계와 민족의식이라는 정신적인 틀을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이는 독립 직후 인도가 분열되지 않은 거대한 대국으로 남아있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만일 대영제국이 인도 전역을 통합하지 못했다면 현재의 인도 대륙에는 수십개의 왕국이나 공화국들이 가득 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영국은 인도의 여러 전근대적인 악습들을 철폐했다. 일례로 1829년 인도에게 2,000년간 지속되었던 순장 풍습인 [[사티]]를 법으로 금지시켰다. 물론 영국의 행위는 식민통치의 편리성을 위해서 힌두교 계급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으로 행해진 것이었으며 지금도 사티 풍습은 암암리에 행해지고 있지만, 영국이 법으로 사티를 금지시킨 것은 [[결과는 좋았다|결과적으로 인도의 인권 면에서 일대업적을 이룬 것은 확실하다.]] 또 고고학적인 성취도 영국이 남긴 그나마 긍정적인 영향에 속한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정복한 지역들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대단히 많았고,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영국 식민지배기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데에 성공한 [[샹폴리옹]]이 있다. [[인도마니아|영국은 화려한 인도 문화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정작 인도인들은 찾아보지도 않던 고대 도시들을 발굴하고 비문들을 해독하는 등 고고학적인 조사를 많이 진행했다. 덕분에 인도 문명의 뿌리인 [[모헨조다로]] 유적과 고대 [[인더스 문명]]이 영국 식민통치기에 그 존재가 드러났으며, 탁실라 지방의 거대한 석조 비석의 탁본을 떠서 고대 [[산스크리트어]]를 해석하는 등 고고학적인 진전도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고대 인도어와 유럽어를 비교해서 세계 최대의 어족인 [[인도유럽어족]]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도 영국의 언어학자 토마스 영이었다. 그 외에 영국 군인 알렉산더 커닝엄은 대표적 [[불교]] 유적인 탁실라를 발굴하고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설법을 펼쳤다고 알려진 사르나트의 녹야원을 발굴, 그 외에도 여러 고대 힌두 사원들을 발굴해서 복구하기까지 했다. 다만 이 역시 긍정적인 부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밝혀낸 고고학적 성과들을 [[오리엔탈리즘]]적인 입맛에 맞추어 바꾸어 썼고, [[답정너|기본적으로 인도 문화가 유럽에 비해서 '열등'하다고 여기고 작업했다.]] 이에 맞춰 학문적 성취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남용되는 경우도 있었으니,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인도유럽어족의 존재이다. 영국인들은 인도유럽어족의 존재를 통해서 [[영국인]]과 [[인도인]]의 ~~같잖은~~ 동족의식을 강조하고 인도인들이 [[타지마할]] 등 그토록 크고 아름다운 건물들과 찬란한 문명을 지을 수 있던 것을 [[우생학|'우월한 [[서구권]]의 피'를 받았기에 가능했다고 믿었다.]] 한때 같은 [[아리아인]]이었던 유럽인들과 인도인들이었으나, 유럽인들은 유럽에서 인종적 순수성을 보존한 데에 반해서 인도인들은 열등한 [[드라비다인]] 등과 통혼하여 피를 섞으며 혈통이 오염, 열화되었고, 같은 인도유럽족이자 우월한 유럽인(영국인)들의 지배를 받는 것은 예전으로 회귀하는 것이니 영국의 식민통치는 합당하다는 것이다.[* 인도인들이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였던 [[인더스 문명]]을 건설하고 도시와 탑들을 쌓아올릴 때, 훗날 영국이 들어설 브리타니아에서는 몽둥이 들고 멧돼지나 사냥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웃기는 이야기다. 애초에 에게 해의 그리스를 제외한 유럽은 문명이 늦게 발생한 편으로 로마제국이 브리튼 섬에 침공했을 때도 그곳은 이곳저곳 켈트 부족들이 난립해 있을 뿐이었고 게르마니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인도인 입장에서도 살짝 억울(?)한 것이 인도는 카스트라는 확고한 체계가 있어서 상위 카스트를 차지하는 아리아인과 하위 카스트를 차지하는 드라비다인은 상당히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애초에 이들은 외모에서부터 큰 차이가 나서 설사 드라비다계 상위 카스트가 있어도 같은 카스트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조금 낮은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이처럼 영국은 [[식민사학|고고학적 업적들마저도 정치적인 목적으로 악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에 영국 치하에서 이루어진 고고학적 연구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나마 영국이 한 짓에 비해서는 나은 편에 속할 뿐이지. 인도인들은 인도 제국에 대해서 당연히 평가가 좋지 않다. 물론 [[식민지]] 시기에 대해서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는 피식민지인들이 어디 있겠냐마는 말이다.[* 그나마 구 식민시절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남아 있는 경우는 [[캐나다]]나 [[호주]]와 같이 아예 현재의 국가 구성원 주류가 [[유럽]]에서 건너온 경우, 또는 [[대만]]과 같이 그 자체로 국가를 이룬 경험이 없는 경우에 한정된다.] 워낙 그 시절 영국이 교묘하게 악랄한 짓을 많이 했기에 인도 제국에 대한 추억이 영 그닥인 것이다. 인도에서 신적 취급을 받는 대위인 [[마하트마 간디]]부터가 영국의 통치에 항거한 [[독립운동가]]이고, 현대 인도를 세운 국부들이 모두 영국에 맞서 싸운 자들 뿐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참고로 인도 제국 말기 인도인들의 영국에 대한 반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오죽하면 인도를 탈출해서 [[일본 제국]]과 손을 잡고 영국과 맞서려 한 [[찬드라 보스]]를 영웅화할 정도였다. 물론 당시 인도인들은 [[일본군]]의 본격적인 침공을 받지 않아 별 피해도 입지 않았기에 [[적의 적은 나의 친구]]란 식으로 일제를 대한 까닭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신들을 통치하는 집단에 맞선 인물을 공공연히 영웅시했던 것을 보면 얼마나 영국 식민지배에 대한 인도인들의 반감이 심했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현대 인도인들의 전반적인 평은 '인도는 영국 통치 시기의 탄압으로 거의 모든 것이 퇴보했다. 다만 좋은 것은 인도의 통일과 고고학적 발견 정도?'로 요약이 가능하다. 참고로 현대 인도인들은 현대 영국에 대해서는 딱히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시절의 영국과 현대의 영국은 워낙 정치적 성향과 입장이 다르기도 하고, 인도가 GDP 순위에서도 영국과 비슷해지면서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국인들을 우러러보거나 대접해주는 것도 아니라 그냥 타 국가들과 비슷하게 취급하면서 살고 있다. 한편 영국인들은 표면상으로는 인도 제국에 대해서 '안타까운 역사'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영국인 특성상, 본심으로는 인도 제국 시기에 대하여 낭만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한때 인도를 포함한 전세계를 호령했던 [[대영제국]] 시기의 제국주의적 영광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애초에 제국주의 시절 열강이었던 나라가 다 이렇다. 멀리 갈거 없이 일본이 이런 경향을 보이는데 일본보다 더 오랫동안 잘나간 제국주의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하류층으로 갈수록 이런 입장을 드러내는 경우가 잦다. 아무래도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도 있거니와 생활 속에서 [[인도]]나 [[파키스탄]]계 노동자들을 만날 일이 가장 잦은 집단이기 때문이다.[* 인도 제국 시기 수많은 인도인들이 영국으로 건너갔다. 이들 중 당연히 사회 계급이 높고 부유한 이들도 많지만, 은연중에 [[인종차별]]이 많은 영국 내에서 이들이 토종 백인들처럼 공평하게 대접받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고, 그렇기에 상류층보다는 중하류층에 더 많이 포진해있다.] 반면 중산층과 상류층의 경우,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을 받기도 했고 [[제국주의|제국주의자]]라는 현대 유럽 최악의 낙인이 찍히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입장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영국인들이 마음 속으로 대영제국 시기에 가지고 있는 낭만이나 향수를 입증하는 것이 바로 영국의 수많은 드라마나 TV물들이다. 영국의 보수적 역사학자인 [[니얼 퍼거슨]]은 저서 제국(2004)에서 인도제국을 켈트-인더스 문명이라고 평하였다.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에서는 유독 스코틀랜드인의 존재감이 컸는데, 이들은 사무원, 무역상, 공학자, 선교사, 차 및 염료 재배꾼, 섬유상 및 교사들로 인도에 정착하였다. 1771년에는 반이상의 최하급사무원이 스코틀랜드인로 이루어졌었고 실제로 초기 3명의 총독은 모두 스코틀랜드인이었다. 식민경영 이후 은퇴기 잉글랜드인들은 본국인 잉글랜드로 돌아가 지역 유지로 사는 것에 만족하여 돌아가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스코틀랜드인들은 하이랜드 클리어런스와 같이 가난한 본국인 스코틀랜드로 돌아가기보단 캘커타에 남아 인도인 현지처와 결혼해 인도에 끝까지 남는 경향이 있었다.[* 일제치하 조선에서도 내지에서 건너온 [[히키아게샤]]들도 본국에서 차별받는 빈농 및 [[부락민]]이 많았고 [[만주국]]으로 건너간 조선인들도 하루 겨우살던 빈농과 노동자들임을 생각해보면 빈곤계층의 한탕주의를 자극해 본국 엘리트들을 대신하여 하류층을 식민지 개척의 첨병으로 보낸 일은 당시 제국주의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던 현상이다.] 스코틀랜드인과 인도인의 통혼으로 태어난 [[https://en.wikipedia.org/wiki/Scottish-Indian|스코틀랜드계 인도인]]은 아버지처럼 하급 공무원 및 장교 등 훗날 영국령 인도의 핵심계층이 되어 인도 제국 운영의 주축이 되었으니 인도제국은 켈트인과 인도인의 결합이 만들어낸 식민제국이라는 주장이다. 스코틀랜드인이자 식민지배에 대해 수정주의적 관점을 가진 니얼 퍼거슨의 저서에서는 위의 언급대로 대영제국의 왕관보석이었던 인도제국에 대한 낭만적인 서술을 꽤 찾아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